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강현 사건
탈주범 지강헌이 서울 서대문구의 한 가정집에서 권총을 들고 인질극을 벌이는 모습(1988년 10월 16일)
‘지강헌 사건’은 1988년 10월8일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충남 공주교도소로 이송 중이던 25명 중 미결수 12명이 집단 탈주해 9일 동안 서울 시내 이곳저곳으로 도주하다 결국 인질극을 벌이다 경찰에 사살되거나 자살에 이른 사건을 가리킨다. 특히 탈주범들 중 지강헌(35)은 인질극을 벌이는 와중에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 사는 게 이 사회다. 전경환의 형량이 나보다 적은 것은 말도 안 된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겠다. 돈이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 법이 이렇다”라고 항변해 이후 그가 남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 씨는 수십 억 원에 대한 사기와 횡령으로 1989년 징역 7년을 선고받았으나 실제로는 2년 정도 실형을 살다가 풀려났다. 지강헌 등은 돈과 권력이 있는 자는 특혜를 받고, 돈과 권력이 없으면 중형을 받는 박탈감과 불평등에 분노한 것이다.
탈주범들이 9일동안 서울 전역을 종횡무진 누비며 자행한 5개 가정집에서의 인질극과 2차례 이상의 강도행각은 실제 행동을 주도했던 지강헌과 이를 계획했던 강영일의 치밀한 합작품이었다. 이들은 가정집에 숨어들어갔다 빠져나올 때마다 피해자들에게 선량한 인상을 주려고 노력했다. 사건 초기에는 자신을 변명하는 쪽지까지 남김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동정쪽으로 돌리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기도 했다. ‘모사’ 격이었던 강영일은 이동하면서 조를 편성할 때마다 지강헌과 한조를 이뤄 범행 계획을 의논했고, 두 사람의 합의가 바로 모두의 행동방침으로 정해졌다. 이들은 탈주 당일인 8일 오후 당초 자신들과 공범관계에 있지 않았던 한재식 등 5명은 함께 다니기에는 ‘수준 이하’라고 판단해 따돌렸다. 이후 자수를 위해 의도적으로 대열에서 이탈한 김동련을 제외하고는 한번도 조별 이동에서 팀워크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들의 예상대로 한재식 등 3명은 한남동 술집에서 불필요한 술값시비로 신분을 노출해 탈주 14시간만에 붙잡혔다.
1988년 10월16일 탈주범 4명은 서울 북가좌동의 한 가정집에서 6명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고 경찰과 대치하다가 자수, 자살, 사살되는 유혈극이 빚었다. 지강헌은 최후의 순간에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들으면서 깨진 유리로 자기 목을 그었고, 침투한 경찰은 그에게 총을 쏘았다.
지강헌은 상습적으로 강도와 절도를 저질러 온 범죄자였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또한 시대의 산물이기도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그 일가의 부정부패가 서민층의 상대적 박탈감을 가속화했다. 이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과 사법제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았고, 이후 굵직한 사건이 터질때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세간에 오르내렸다.